[리뷰]쉽게 지울수 있는 펜
'글 못쓰는 선비가 붓을 탓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현대적으로 해석해보자면, '프로는 연장을 탓하지 않는다'는 말과 통하는 것이겠죠. 의심할 여지없이 정답인 말이지만,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사진 실력이 없어도 카메라가 좋으면 어느 정도 건질만한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글씨를 정말 못쓰는 사람의 경우라면, 펜과 종이의 좋고 나쁨에 따라 글씨가 달라지기도(제가 그렇습니다) 하니까요.

개인적으로 상당히 많은 수의 펜을 가지고 있습니다. 샤프와 연필, 볼펜과 만년필 등등 그 종류도 다양합니다. 앞서 언급했던 이유도 있겠습니다만, 어떤 일을 하면서, 그림을 그리면서 즐겨쓰는 펜이 다르고 그에 따라 결과물도 달라집니다. 뭐. 환경에 지배를 심하게 받을 만큼 강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최근 재미있는 펜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국내에 들어 온지 꽤 되었고 저는 대략 한달 전쯤에 구매를 해 잘 쓰고 있는 펜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글씨를 잘 쓰게 도와주는 종류라든가, 소유한 사람의 품격(이라 쓰고 재력으로 읽는다)을 과시하는 펜은 더더욱 아닙니다. 이 펜의 이름은 Frixion Pen입니다.
왜 bikbloger는 이 펜을 소개하는 것일까요? 이 펜에는 다른 펜에는 없는 특징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지울 수 있는 펜입니다. 사실, 기존에도 BIC의 펜 -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데, 청록색 몸체에 뚜껑에 지우개가 달린 - 처럼 지울 수 있는 볼펜 종류라든가, 볼펜 지우개 같은 물건들이 있었으나 종이가 심하게 상하거나 제대로 지워지는 펜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펜은 감쪽같이 지워집니다. 종이에 묻은 기존 펜들의 잉크를 지우개로 지우는 경우, 남아 있는 잉크가 깨끗이 닦이지 않습니다. 종이의 표면이 우리 눈으로 보는 것처럼 매끈하지는 않기 때문이죠.
이 펜은 일본의 전통적 필기구 회사 중 하나인 파이롯트(Pilot)의 제품입니다. 국내에서는 0.3mm 두께의 하이테크 펜으로 유명한 회사죠. 그렇다면 이 지울 수 있는 펜의 원리는 무엇일까요? 비밀은 잉크에 있습니다. 파이롯트는 열에 반응하는 잉크를 만들었습니다. 섭씨 약 65도가 되면 잉크의 색이 사라집니다. 반대로 영하 10도씨 이하로 온도가 떨어지면 다시 색상이 보입니다. 물론 이 고온과 저온은 일반적인 생활의 환경은 아니므로, 일상 생활에서는 원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잉크의 색이 사라지는데 필요한 온도는 뚜껑부분에 붙은 고무를 종이에 문질러 발생시킵니다. 이 정도로도 섭씨 65도의 열이 난다는 것이 신기하군요. 그럼 실제로 지워지는지 보겠습니다.

예. 잘 지워집니다. 물론 마찰열로 지워도 됩니다만... 더 확실한 방법은 역시 라이터로 살짝 구워주면 더 깨끗이 지워집니다. 다만, 지우고 나도 글씨를 눌러 썼다면 종이가 눌린 것이 보입니다.
글씨를 지운 후에 종이를 잘게 찢어서 버린다고 해도 독한 마음먹고 종이를 붙여 액화질소를 쏘이는 방법을 동원하면 보이게 됩니다. 하다못해 냉장고 냉동실에 넣었다가 빼도 희미하게 보입니다. 또한 글씨를 눌러서 썼다면, 글씨 부분을 연필로 살살 칠하면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이 펜은 일반펜은 물론이고 형광펜도 있습니다. 위 사진 속의 펜은 0.7mm의 굵기입니다. 필기감은 다소 부드러운 편이지만, 잉크의 점성이 강하지는 못합니다. 잉크 잘나오는 수성펜 같은 느낌이랄까요?
개인적으로 두꺼운 펜을 선호합니다(이 편이 그나마 글씨가 빈해 보이지 않습니다). 보통 0.7mm 정도 두께의 펜을 필기용으로 사용합니다만, 이 펜의 0.7mm는 일반적인 필기용으로는 적당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0.5mm 두께의 제품도 있습니다.

최근에는 국내의 다양한 사이트에서 그리 비싸지 않은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일반은 150엔, 형광펜은 200엔이라고 합니다만 국내에는 정식 수입선은 아직 없는 듯 합니다. 하이테크 펜을 수입하는 곳이 파이롯트 펜 전부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왜 이 제품은 안하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뭐. 하이테크 펜이 워낙 잘 팔려서 그런 걸까요? 어찌되었건, 국내에서도 오픈 마켓을 통해 구매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위의 3가지 색상 묶은 것을 배송비 포함 12200원에 구매했습니다.

조금 가격대가 있는 잉크의 경우, 시간이 지나도 잘 변하지 않고 잘 지워지지 않습니다. 얼마전 오래된 잡동사니를 정리하다 무려 1998년도 문서를 찾아냈는데... 종이는 이미 노랗게 색이 바랬지만, 파카의 quick ink로 쓴 글씨는 예전 그 색이더군요. 이렇게 '변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측면의 반대편 사고방식인 '쉽게 지운다'로 접근한 이 frixion pen에는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소위 '발상의 전환'인 것이죠.

펜은 이렇지만, 문득 사람은 상황에 따라 잘 변해야 하는지, 아니면 변하지 않는 것이 좋은지를 생각하게 되는 밤입니다.

PS. 디자인 쇼핑몰인 1300K에서도 팔고 있네요. 개당 2500원이니 3개 하면 7500원, 배송비 포함하면 딱 1만원이군요. 12200원 보다는 싸군요(지르러가기)



by bikbloger | 2008/01/28 23:54 | Review, 뽐뿌의 다른 이름 | 트랙백(1) | 핑백(2) | 덧글(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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