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지미헨드릭스, 그리고 트래킹화
사람과의 관계는 참 다양하다. 그 중 가장 신기한 관계는 하루가 멀다고 연락하고 만나다가 특별히 싸우거나, 서로의 종교나 정치관, 세계관을 비난하지 않아도, 채무와 그에 대한 변제와 상관없이 소원하고 멀어지는 관계일 것이다. 이런 관계를 닮은 옷도 있다. 어떻든 한 때는 마르고 닳도록 입다 어느 순간 입지 않게 되어버린. 다들 이런 옷들이 한 두벌씩은 있을 거다. 내게도 그런 옷이 있다. 바로 아래 사진과 같은, 옷장을 정리하다 발견한 카고스타일 청바지다.
이 바지를 입지 않게 된 것은 살이 많이 빠진(거의 10kg 가까이를 덜어냈다) 시점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전까지는 정말 하루가 멀다고 입고 다녔고. 사실 이 바지는 내가 산 것이 아닌, 아버지의 선물이다. 갑자기 살이 불어 갖고 있는 바지 중 가장 큰 것을 주로 입고 다니다 보니 금새 헤지고 떨어진 아들의 바지를 보고(뭐. 이게 패션이라는 것은 세대에 따라 우주적인 시각차가 있으니) 보다 못한 아버지의 조치(?)인 셈. 이 바지를 사는 순간 아버지 모습을 생각했다. 평생 양복 입고 직장생활을 하셨으니 청바지는 잘 모르실 테고, 할인 매장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곳에서 가장 그럴싸해 보이는 매장에 들어가 헛기침 두어 번 하시고, 누군가에게 아들의 외모를 설명하고 적당한 것을 골라달라 하셨을 터. 물론 계산은 현금으로 하셨을 거다. 여전히 카드사용은 빚더미에 올라 앉기 딱 좋은 소비 수단이라 생각하시는 전직 은행원이니까.
처음 바지를 보고 사이즈를 확인하기 위해 안쪽의 탭을 보다가 발견한 태그. Hendrix라는 이름과 이미지를 봐서는 Jimi Hendrix일 것이며, Jimi Hendrix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별 의미가 없는 태그였을지도 모르겠다. 음악을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 음악을 잘아는 아버지의 선물은 분명 아니다. 아버지에게 음악이라고는 남들 다 아는 클래식, 트로트 몇 곡뿐이며, 일요일마다 ‘전국노래자랑’을 즐겨 보는 평범한 취향의 소유자기 때문이다. 오래간만에 이 태그를 보는 순간 아버지께 고맙고 죄송한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사업 크게 하다 한 순간에 거리에 나앉게 된 망한 집안의 장남이 대부분 그러하듯,할아버지 대신 법적 소송과 동생들 공부 뒷바라지에 꽤 오랜 시간을 보내셨다. 하지만 부단한 노력으로, 두 아들이 아무 걱정 없이 공부만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셨다. 물론 두 형제 모두 공부보다 다른 것에 신경 쓰며 살았지만, 학비와 집안을 걱정해야 했다면 Jimi Hendrix는 물론 Jim Morrison, Janis Joplin이 얼마나 위대한 뮤지션인지 Ella Fitzgerald의 목소리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포르쉐 911의 엔진은 왜 뒤쪽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뿐인가. 즐겨 쓰는 온라인의 대화명 역시 다른 것이었을 확률이 높고, 지금과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아버지는 처한 환경에 따라 쉽게 사치가 되어버리는 가치를 알고, 즐기게 해주셨고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 멋지고 아름다운 삶인지를 직접 보여주셨다. 나는 이렇게, 누구에게나 존경스러운 아버지께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 철없던 시절 아버지께 반항하느라 정신 없었기에 남보다 몇 배는 더 크고, 많이 해야 할 - 도 못하는 못난 아들이다. 이런. 그룹 N.EX.T의 ‘아버지와 나’ 가사처럼 멋진 포스팅을 하려 했지만 불효자의 아버지 생각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신파밖에 될 수 없는 것인가 보다.
젊은 시절, 여행은 꿈도 못 꾸신 아버지. 며칠 후 중국 여행을 가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금이라도 가볍게 다녀오시라 트래킹화 하나 샀다. 함께 가시는 어머니께는 시원한 여름 모자를 드릴 것이다. 아버지가 사주신 청바지와 그 청바지의 태그에서 스포이드처럼 취향을 빨아올릴 수 있는 여건이 되는 생활의 증여에 비하면 가격도, 의미도 적은 일상적 선물일 뿐이다. 부모님이 가실 때 가장 많이 우는 자식은 가장 효도를 하지 못했던 자식이라 했던가. 지금의 나라면, 당신이 가진 후 저 바지 부여잡고 대성통곡이다. 그러지 않기 위해 지금이라도 노력해야겠다. 이미 대성통곡은 거스를 수 없는 수순이고 대성통곡 중 기절이나 하지 않으려면.

글을 쓰는데 목과 심장이 계속 따끔거린다.

PS. 아버지, 감사합니다. 그리고 존경합니다.





by bikbloger | 2009/07/02 21:25 | Early Editorial - 생각 | 트랙백 | 덧글(10)
트랙백 주소 : http://bikblog.egloos.com/tb/1924249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Commented by 동물원 at 2009/07/03 13:48
평생 등산을 하셔서 건강하실 줄 만 알았던 저의 아버지는 2달전 급작스럽게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신 후 남기신 일기를 보니 사람, 산, 술 이 세 가지를 퍽이나 좋아했던 한 남자의 얘기가 빼곡히 적혀있어 가슴이 먹먹하더이다. 아버지로서의 모습만 알고 당신만의 취미생활을 즐기시는 데 그 흔한 등산화 한번 갈아드린 적 없던 제 모습이 이제 후회로 남네요. 효도 많이 하시길.. ^^
Commented by bikbloger at 2009/07/08 11:00
감사합니다. 효자되야죠.
Commented by 지나가다 at 2009/07/03 20:48
좋은 아버님에 착한 아드님이십니다. 잘 보고 갑니다.
Commented by bikbloger at 2009/07/08 11:00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지인 at 2009/07/04 01:05
더운 글 잘 읽었습니다
대성통곡 덜 하실 수 있도록 평소에 작은 표현이라도 자주 해보세요.
마음을 행동으로, 그전에 말로 먼저 표현하시는 습관,
처음엔 어색하고 민망하기도 하지만 부모님들 좋아하셔요. 습관되면 자연스럽구요.
아직 그럴 수 있는 날들이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하고 다행한 일인지요.
Commented by bikbloger at 2009/07/08 11:01
네. 매번 하려고 하려다가 민망해 못하고 있습니다. 일단 하면 쉬울것 같기는 합니다만... 처음 한번이 어렵네요.
Commented by 엿장수 at 2009/07/05 18:03
전 몇 년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님의 포스트를 보고, 너무 부러웠습니다. 뻔하디 뻔한 얘기지만, 트래킹화를 선물할 사람이 없는거죠... 그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누군가에게 굉장한 부러움을 받는 사람이란거요...
Commented by bikbloger at 2009/07/08 11:02
아. 그게 그렇게 되는군요.
Commented by 장풍고수 at 2009/07/06 20:07
오래간만에 들렀는데, 반성하게 만드는 글이군요.
지인님 말씀, 빜블로거님께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말이지 싶습니다.
Commented by bikbloger at 2009/07/08 11:02
그러게 말입니다. 살아생전에 잘해야...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



저주받은 2%의 감각에 대한 뼈저린 술회
by bikbloger 이글루스 피플 2006 이글루스 TOP 100 2007 이글루스 TOP 100
Calendar
메모장

English Translation!!

* 저작권에 대한 공지입니다.



모든 인디를 응원합니다.


'무선공유기의 공유'
Join the FON movement!
FON movement

* 2006년, 우리 모두 금연(今燃)!!
Who Links Here
덧글도우미


블로그 예절 캠페인


My blog is worth $114,037.08.
How much is your blog worth?

이글루 파인더
카테고리
전체
Early Editorial - 생각
I'm POMPU on U - 질러라
최고의 PDA, iPod touch
Review, 뽐뿌의 다른 이름
Neo Early - 잡다구리
Hungry Eyes - 영상
Mr. Motor Rising-자동차
Soul of AUDIBLE - 음악
Talk Mixer - 모바일,핸폰
PORSCHE 911-남자의 로망
이글루스는 싸이가 아니다
이전블로그
2009년 12월
2009년 11월
2009년 10월
more...
최근 등록된 덧글
너무 늦게 왔나요? 저도 요즘에 극..
by 유신성 at 19:24
방수 방진 다 되는군요~ 잘 보고 ..
by dennycrane at 11/24
방수기능은 없는 거 아닌가요? 제..
by dennycrane at 11/24
토목이나 건축 현장 기사들은 반길..
by 현장기사 at 11/23
애인대행.역할대행
by 여기클릭 at 11/21
레드 컬러 정말 마음에 드네요....
by Ray at 11/21
카시오가 나름의 마케팅 포인트를..
by FatherBr at 11/20
모양도 예쁘고 방수방진의 이너..
by 천하귀남 at 11/20
카시오야 방수 방진 휴대전화 쥐즈..
by 똥사내 at 11/20
이 정도면 하나의 패션 아이템 수..
by 냥이 at 11/20
최근 등록된 트랙백
돈내고 보는 극장광고, 해도해도..
by Come and Communicate,
[로드앤/토요타] 토요타 캠리와..
by 로드앤(Roadn.com)의 블로그
ABBYY FineReader 10 한글 OC..
by UbiSpace.net
데스크탑은 아직 죽지 않았다! 올인..
by PAVLO
너무나도 다른 스타일의 넷북 (HP..
by PAVLO
소니의 13.9mm 예술, VAIO X 현..
by 늑돌이네 디지털 동굴 라지온 lazi..
자연을 위한 절약, 친환경 치약 짜..
by 초로쿠왕자의 깨끗한 지구 만들기
다즈의 생각
by thedaz' me2DAY
13.9mm 풀 플랫 노트북, 소니 ..
by 소니, 스타일을 말하다
소니 파티샷(Sony Partyshot)!
by chanmin.net
라이프로그
블로거, 명박을 쏘다
블로거, 명박을 쏘다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갖고 싶은 게 너무나 많은 인생을 위하여
갖고 싶은 게 너무나 많은 인생을 위하여

윤광준의 생활명품
윤광준의 생활명품

지식 e
지식 e

기자로 산다는 것
기자로 산다는 것

컬처 코드
컬처 코드

나는 아이디어 물건에 탐닉한다
나는 아이디어 물건에 탐닉한다

습지생태보고서
습지생태보고서

블로그 ON
블로그 ON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편집 디자이너를 완성하는 인쇄 실무 가이드
편집 디자이너를 완성하는 인쇄 실무 가이드

iCon 스티브 잡스
iCon 스티브 잡스

rss

skin by zodiac47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